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문단 편집) === 말년과 사망 === 1801년 장남 응우옌푹까인이 사망했음에도 자롱 황제는 따로 태자를 두지 않았다. 1815년에 되어서야 [[민망 황제|응우옌푹담]]을 태자로 봉했고 응우옌푹까인의 자손들을 계승권에서 제외하였다. 생전 자롱 황제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왕조를 부활시켰지만 서방 세력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장남과 달리 태자 응우옌푹담은 자롱과 반 기독교적 성향이 일치하여 마찰이 없었고 유럽인과 특히 프랑스인을 겉으로는 존중하되 어떤 우대도 하지 말고 땅을 내주지 말라는 등 반기독교 성향을 유지할 것을 당부하였다. 1820년 2월 1일 자롱 황제는 태자와 많은 황자와 대신, 레반주옛, 범등흥(范登興) 등을 입궁시켜 유서를 미리 전했으며 레반주옛과 범등흥을 보정대신으로 임명하였고 그로부터 2일 후인 1820년 2월 3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총 재위 18년, 향년 58세였다. 태자는 응우옌푹끼에우로 개명하고 제위에 올라 가륭 연호를 폐지하고 명명(明命)으로 개원하였다. 자롱 황제의 유해는 승천고황후(承天高皇后)로 추존된 통티란(Tống Thị Lan, 宋氏蘭, 송씨란)의 봉분 왼쪽에 매장되었는데 두 능을 통틀어 천수릉(天受陵)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